L’homme qui rit – Victor Hugo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는 영국 해변에 버려진 10세 소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의 단체 콤프라치코스에 의해 쭉 찢어진 입을 가지고, 항상 웃는 표정만을 해야 하는 이 소년의 이름은 그윈플레인입니다.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슬픔과 조롱 속에서도 항상 웃어야만 하는 이 소년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그 소년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지요.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는 독자의 기대를 철저하게 부숴 나갑니다. 주인공이 간신히 찾은 일상은 또다른 위협에 의해 깨지고, 결국 붙잡은 행복은 순식간에 손 안에서 스러집니다. 웃는 남자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지요. 그는 결국 막다른 선택에 다다릅니다.
위고는 만연체를 통해 절망하는 그의 심리, 그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사회를 치밀하고 세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특유의 호흡 긴 문장을 통해서 독자를 설득하고, 주인공의 불행을 이야기합니다.
- 불행의 연속, 행복해질 수 없는 소년
1690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우르수스는 누더기 옷을 입은 열 살 소년 그윈플레인을 발견합니다. 그윈플레인은 어린 아이들의 외모를 훼손하여 그 아이들을 사고 파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인 ‘콤프라치스코’에 의해 얼굴을 훼손당하여 항상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을 가지게 된 아이입니다.
이 불쌍한 아이는 버려진 이후 도시로 가려고 오랫동안 방황합니다. 아이는 차가운 밤을 견디며, 점점 다가오는 죽음에 맞서 싸웁니다. 교수대에서 처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보며 공포에 질리고, 얼어죽은 여인의 품 속에서 살아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아이와 함께 피난처를 찾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아이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점점 절망에 빠져가는 아이는 우르수스에게 발견되어, 그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소설의 시간은 흘러 어느 새 15년이 지났습니다. 그윈플레인은 훼손된 얼굴을 제외하고는 매력적인 청년으로 성장했으며, 그윈플레인이 구출한 아이 ‘데아’는 눈은 멀었지만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났습니다. 데아와 그윈플레인은 서로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 순수한 영혼을 통해 교감하며 순사랑에 빠집니다.
우르수스, 그윈플레인, 데아는 서커스를 통해 생계를 이어나갑니다. 그윈플레인은 서커스를 통해 자신의 웃음을 팔고, 관객들은 기괴한 웃음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습니다.
‘C’est en riant que Gwynplaine faisait rire. Et pourtant il ne riait pas. Sa face riait, sa pensée non. L’espèce de visage inouï que le hasard ou une industrie bizarrement spéciale lui avait façonné, riait tout seul. Gwynplaine ne s’en mêlait pas. Le dehors ne dépendait pas du dedans.
‘그윈플레인이 그들을 웃게 만든 것은 웃으면서였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웃었으나 그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와 특별한 작업이 그를 위해 만들어 낸 놀라운 얼굴은 그 스스로 웃었다. 그윈플레인은 간섭하지 않았다. 외면은 내면에 의존하지 않았다. ‘
어느 날 왕 제임스 2세의 사생아인 조지아나 공작 부인은 그윈플레인의 서커스에 참석합니다. 공작 부인은 일상의 지루함 속에서 그윈플레인의 남성적인 매력과 기괴한 얼굴에 사로잡히고, 그윈플레인은 조지아나 공작 부인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태도에 빠져듭니다.
그런 그윈플레인 앞에 그의 얼굴을 망쳐놓은 남자가 다시 나타납니다. 하지만 곧 그남자는 왕실 병사들에게 잡혀가고, 그웬플레인은 그 남자가 잡혀간 런던 지하감옥에서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제임스 2세가 영국을 다스리던 시절, 왕의 반대파 귀족의 아들이었던 그윈플레인은 왕의 지시로 납치당해 콤프란치코스에 팔려 기괴한 얼굴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실이 밝혀지고, 그윈플레인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원래 가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을 팔며 살아가던 그윈플레인은 귀족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합니다. 한편, 우르수스와 데아는 그윈플레인이 죽었다는 거짓된 사실을 듣게 되고,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데아는 사랑하는 그윈플레인을 잃은 슬픔 속에 더욱 약해져만 가지요.
알게 모르게 받는 차별, 그리고 귀족 사회에 만연한 위선과 부도덕성에 실망한 그윈플레인은 영국 상원에서 그 모습을 고발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내용보다는 그윈플레인의 외모에 집중하여 비웃음만을 보이지요. 그는 귀족들에게 여전히 서커스를 하던 ‘웃는 남자’에 불과했습니다. 그윈플레인은 결국 자신의 진짜 집으로, 우르수스와 데아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웬플레인은 우르수스와 데아가 영국에서 추방되기 직전 그들을 찾아냅니다. 기적처럼 재결합한 그들에게는 행복만이 남아있어야만 했지요. 하지만 운명은 그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네덜란드로 가는 배 안에서, 데아는 재회한 그웬플레인의 품 속에서 죽고, 그웬플레인은 슬픔에 몸을 바다로 던집니다. 우르수스의 늑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외롭게 울부짖습니다.
- 부당한 사회의 횡포, ‘웃는 남자’
빅토르 위고는 그윈플레인을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그려냈지만, 사실상 그윈플레인만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눈먼 소녀 데아, 우르수스, 어떻게 보면 세상의 잔인함에 희생된 모든 사람들이 소설에서 말하는 ‘웃는 남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저자가 ‘레미제라블’에서 묘사한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사회적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는 소시민들입니다. 위고는 정치에 대한 비관적 성찰을 통해서 사회적 하층민의 비참함을 더욱 강화합니다.
위고는 아마 이 작품에서 사회의 비참함을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윈플레인은 의회에서 귀족의 부패를 고발하고, 그들은 냉대로 그윈플레인에게 응답했지요. 그들의 무관심과 조소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조금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글쎄요,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을까요. 물론 지금은 소설 ‘웃는 남자’가 쓰여진 지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가 진정으로 꿈꿨던 세상이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수많은 웃는 남자가 저마다 사회의 불합리함을 부르짖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래도 우리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 왔고, 나아가고 있고,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희가 그것을 이끌어가는 주축이 되길 바랍니다. 더 이상 세상에 웃는 남자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말입니다.
‘레미제라블’, ‘노르트담 드 파리’와 함께 위고가 왜 낭만주의의 대가인지, 그의 작품이 고전으로 꼽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 by Lind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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