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모두가 행복한 세계, 참 멋진 디스토피아 : 당신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나요?

린딘 2021. 1. 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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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혹시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들어 보셨나요? 토마스 모어의 동명의 소설, '유토피아'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를 '이상향'과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가난, 빈곤, 불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세계 말이에요. 반대로 '디스토피아'라는 단어는 정확히 유토피아와 반대의 세상을 가르키지요. 암울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세계, 우리는 보통 디스토피아라는 말을 들으면 그런 세상을 떠올립니다. 근데 헉슬리의 소설 속 세상은 그런 면에서 참 특이합니다. 모두가 행복한 디스토피아, 당신은 상상이 가시나요?

 

-모두가 행복한 세계, 참 멋진 디스토피아 : 당신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나요?

 

 정정할게요. 정말로 '모두'가 행복한 세계는 아니에요. 소설 속의 '원주민 구역'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행복한 세계입니다. 이곳 원주민 구역은 아직 이전 사회의 잔재가 남아있는 곳이지요. 독자들, 저와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시와 소설, 그리고 사랑이 천시되는 세계에서, 오직 야만인만이 그런 것들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소설 속 다른 사람들, 이른바 문명인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계급과 정해진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섹스를 단순한 놀이로 여기고, 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개념을 경멸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나쁘지 않습니다. 적당한 근로 시간과, 모두에게 충분한 여가시간 또한 주어집니다. 계급에 따른 차별도 없지요. 그들에게 계급의 차이란 단지 하는 일의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의 시선으로 보면 앱실론 계급과 베타 계급이 지배층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말이에요.

 '존'은 야만인 구역에서 살아가던 야만인입니다. 소설은 그런 '존'이 문명사회로 들어가 문명인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중점적으로 다루지요. 레니나와의 사랑과 경멸 사이에서 고통받고, 헬름홀츠와의 이야기를 통해 문명사회에 대한 환멸을 재확인합니다.  존은 결국 본인이 문명사회에 적응하지 못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지요. 그에 따라 존은 자신을 문명사회에서 내보내 줄 것을 요청하나 거부당하고, 자신의 손으로 삶을 마무리하며 소설은 끝이 나게 됩니다.

 

 불행해질 권리 : 고통이 동반되는 자유 의지

 

 소설 후반부에서 존은 총통 몬드에게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 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요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쟁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억압과 독재 속에서 고통받고, 굶주리고 있는 제 3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게는 현실이 더욱 디스토피아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래도 끔찍하지 않느냐고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올더스 헉슬리의 유토피아는 썩 괜찮은 세계입니다. 그래서 더 무섭기도 합니다만 말이에요. 개인의 생각의 방향이 통제되고, 약물로 감정을 억제하는 세상이 멋져 보인다니, 헉슬리는 이런 세상이 오는 걸 더 무서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겠지만, 적어도 저는 굶주리며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쨋거나 삶 속에서 행복하니까요.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봅시다. 헉슬리가 그린 세상은 개인의 자유의지 중 일부를 희생해서 공리주의를 실현시킵니다. 희생된 자유의지도 어쩌면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요. '마'라는 쾌락에 본인의 자유 의지를 저버린 것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이런 세계에 존의 행동은 큰 파장을 불러오고, 이는 세계를 지배하는 공리주의적 원칙에 타격을 주게 되지요. 후반부에 존이 레니나에게 가하는 채찍질을 시발점으로, 이른바 문명인들 내부의 광기를 폭발시키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적어도 '사회'에서는 옳지 않아 보입니다.누구나 소마 한 알을 먹는 것으로 본인의 희생을 통한 불행을 행복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요. 개인의 감정을 내세워 사회를 바꾸는 것은 소설 속 대부분의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행의 파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감정을 포기해야만 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상황은 조금 달라집니다. 그(혹은 그녀)가 사회를 바꿔나가는 것에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따를 것은 자명합니다. 때때로 좌절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고달픔 끝에 느껴질 성취감 또한 작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서 생각해 봅시다. 결국 우리가 이를 평가한다는 것은, 소마를 먹어서 느껴지는 단순한 '행복'의 가치-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이를 통해 지켜지는 사회 '행복'의 가치도 고려해야겠지요-와 힘든 역경과 고난 끝에 성취한 각 개인들의 '행복'을 다르게 바라본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이는 평가자의 관점을 통해 긍정과 부정의 정도를 나타낼 수 있겠지요. 저같은 경우에는 존의 행동을 부정에 무게추를 조금 더 달아 평가했을 뿐입니다.

 글이 길었습니다.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물론, 어떤 쪽에 무게를 두어도 헉슬리의 세계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은 확연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저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미래, 정말로 '멋진 신세계'를 그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참 생각해 볼 것이 많았던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책 속의 대사를 빌려 마무리하고 싶네요.

 

"오, 멋진 신세계여..."

 

- by Lindin -

참 멋진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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